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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이 사라진 시대, 제철이 돌아오다 제철리즘

2026.09.205분
핵심 요약

기술 발전과 유통망으로 사시사철 원하는 것을 누릴 수 있게 되었지만, 소비자는 '지금이 아니면 즐길 수 없는' 제철 식재료와 한정판의 희소성에 다시 가치를 두고 있어요.

제철의 개념이 미식을 넘어 패션, 굿즈, 여행 콘텐츠 등 삶 전반의 경험 소비 트랜드로 확장되며 '안정된 시간'을 즐기는 문화가 자리 잡았어요.

제철의 가치는 남의 달력이 아닌 자신만의 적절한 순단(카이로스)를 기다리고 온전히 살아내는 삶의 태도로 이어져요

사계절 내내 무엇이든 먹을 수 있는 시대, 사람들은 왜 다시 ‘제철’을 찾아 나설까. 풍요는 기다림을 지웠지만, 사람들은 다시 계절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제철 음식에서 계절 한정 경험까지, 지금 우리는 시간을 소비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계절이 차려낸 맛있는 식탁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태양 아래 무르익은 계절이 한 접시 한 접시 모습을 드러낸다. 신한 Premier 청담 6층에 자리한 한식당 ‘십이율’. 국악에서 열 두 개의 음률을 뜻하는 십이율은 예로부터 계절의 변화와 자연의 질서, 시간의 순환을 상징했다. 봄의 숨결과 여름의 열기, 가을의 풍요와 겨울의 고요가 각기 다른 음으로 세상을 울리듯, 이곳의 음식도 자연이 만들어낸 계절의 리듬을 접시 위에 풀어낸다. 과연 이름처럼, 십이율에는 여름이 가장 충만한 순간에만 허락되는 맛들이 조용히 차려졌다.

주안상에는 여름 보양식의 대명사인 장어가 올랐다. 향긋한 깻잎과 알싸한 향을 머금은 생강채, 오랜 시간 숙성한 묵은지를 곁들인 장어는 씹을수록 깊은 감칠맛을 더하며 한여름의 기운을 입안 가득 전했다. 메인 바비큐에는 초당옥수수와 햇감자 등 제철 식재료가 함께했다. 숯불이 남긴 깊은 불향 사이로 햇볕을 머금고 자란 여름 들판의 생명력이 은은하게 살아났다. 식사의 여운을 갈무리하듯 등장한 빙과는 무더위를 가르는 한 줄기 저녁 바람 같았다. 붉은 히비스커스 젤리 위에는 우리 쌀과 우유로 빚어낸 아이스크림을 올리고, 보리와 밀로 만들어 바삭하게 구워낸 튈을 잎사귀처럼 얹었다. 새콤한 향과 부드러운 단맛이 번갈아 스치며 혀끝에 시원한 여운을 남겼고, 한 상 가득 머물렀던 여름은 그렇게 가장 아름다운 순간으로 마무리됐다.

익숙한 한식이 전혀 새로운 얼굴로 다가왔다. 그 순간 문득 일본의 에세이스트 미즈카미 쓰토무가 《흙을 먹는 나날》에서 남긴 문장이 떠올랐다. “제철을 먹는다는 것은 단지 가장 맛있는 순간을 맛보는 일이 아니다. 그 계절의 햇빛과 바람, 비와 흙을 함께 먹는 일이다.” 생각해보면 제철 음식이란 단순히 가장 신선한 식재료를 의미하는 말이 아니다. 자연이 가장 풍요로운 순간에 내어주는 시간의 선물이다. ‘십이율’에서 맛본 여름도 그러했다. 그것은 햇감자와 장어, 옥수수의 맛을 넘어 햇살과 바람, 장맛비와 흙냄새까지 함께 담아낸 계절의 기록이었다.

신한 Premier 청담에 있는 ‘십이율’의 제철 코스 메뉴
신한 Premier 청담에 있는 ‘십이율’의 제철 코스 메뉴

편의성의 시대, 재발견한 기다림의 가치

여름은 원래 기다리는 계절이었다. 장마가 끝나고 태양이 가장 높이 떠오를 무렵이면 수박은 가장 달아졌고, 바닷물이 따뜻해질 즈음이면 민어와 전어가 제맛을 냈다. 사람들은 음식을 통해 계절을 느꼈고, 계절을 통해 시간의 흐름을 배웠다. 하지만 풍요의 시대가 찾아오면서 계절은 더는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게 되었다. 비닐하우스와 스마트팜, 냉동 물류와 글로벌 유통망은 자연의 시간을 압축했고, 계절의 경계를 흐려 놓았다. 한겨울에도 딸기를 먹고, 봄에도 귤을 만나는 일이 낯설지 않다. 기술은 기다림을 불편함으로 규정했고, 소비는 점점 더 즉각적인 만족을 향해 나아갔다.

그런데 역설적인 일이 벌어졌다. 모든 것을 사시사철 누릴 수 있게 되자 사람들은 오히려 ‘지금 아니면 맛볼 수 없는 것’을 찾기 시작했다. 여름이면 초당옥수수와 제주 애플망고는 출하 소식만으로 화제가 되고, 민어철이 시작되면 예약 경쟁이 벌어진다. 봄에는 두릅과 참취, 가을에는 새우와 전어, 겨울에는 과메기와 석화가 사람들을 움직인다. 백화점과 호텔에서는 계절 한정 메뉴를 선보이고, 레스토랑들은 제철 식재료를 중심으로 코스를 새롭게 구성한다. 산지 직송 플랫폼은 ‘이번 주 가장 맛있는 수확물’을 전면에 내세우고, SNS에는 특정 품종의 과일이나 짧은 시기에만 맛볼 수 있는 식재료를 찾아 나선 기록들이 끊임없이 올라온다. 풍요 속에서 사람들은 다시 희소성을 찾게 된 것이다. 제철의 진짜 가치는 맛보다 시간에 있다. 지금 이 아니면 만날 수 없고, 조금만 늦어도 지나가버리는 순간의 감각 말이다. 그리고 해마다 돌아오는 그 짧고도 선명한 맛을 통해 흘러가는 시간을 다시 한번 온몸으로 확인한다. 장맛비가 그친 뒤의 뜨거운 공기, 잘 익은 과일에서 번지는 향기, 바닷바람을 머금은 생선의 맛은 한 시절의 풍경과 감정을 함께 불러낸다.

🍎제철 경험은 시간을 통과하는 일

실제로 소비 트렌드 조사에서는 한정판과 시즌 한정 상품에 대한 선호가 꾸준히 높아지고 있다. 유통업계에 따르면 벚꽃 시즌 음료, 크리스마스 에디션, 여름 한정 굿즈 등은 해마다 조기 품절 사례를 만들어내고, 브랜드들은 이제 신제품보다 ‘한정된 시간’을 판매하는 데 더 많은 공을 들인다. 소비자는 물건을 사는 것이 아니라 그 계절에만 참여할 수 있는 경험을 구매한다. 유명 디저트전문점의 망고셔벗과 수박주스, 편의점의 계절 한정 맥주와 디저트, 호텔업계의 서머 패키지 등이 대표적이다. 매년 비슷한 상품이 출시되는데도 소비자들은 다시 줄을 선다. ‘지금 아니면 놓친다’는 시간의 가치 때문이다.

흥미로운 점은 제철의 개념이 더는 식재료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굿즈와 패션, 콘텐츠, 여행에 이르기까지 라이프스타일 전반으로 확장되고 있다. 여름이면 햇볕에 그을린 듯한 ‘태닝 키링’과 비즈 액세서리가 SNS를 채우고, 라탄백과 크로셰 패션이 다시 유행한다. 가을이면 필름 카메라와 독립서점 투어가 하나의 시즌 문화로 소비된다.

콘텐츠도 마찬가지다. 과거 여름이 납량특집과 공포영화의 계절이었다면 최근에는 청량한 음악, 성장소설, 여름밤 독서가 새로운 계절 콘텐츠로 자리 잡았다. 교보문고는 여름 독서 캠페인을 진행하며 “독서는 여름이 제철”이라는 메시지를 내세웠고, 서울시를 비롯한 여러 지방자치단체는 한강공원과 야외광장에서 달빛 독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여름밤 야외 영화제와 선셋 콘서트, 루프톱시네마도 같은 맥락이다. 같은 책이라도 장마철 카페에서 읽는 경험과 겨울 벽난로 옆에서 읽는 경험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는 키워드가 바로 ‘희소성의 역설’이다. 서울대학교 소비트렌드분석센터의 김난도 교수는 최근 소비자들이 가격이나 효율보다 ‘특정한 시기에만 허락되는 것’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한다고 분석했다. 음악은 스트리밍으로 무한히 들을 수 있지만 여름 페스티벌 티켓은 한정돼 있고, 영상은 언제든 볼 수 있지만 한강 노을 아래 열리는 야외 상영회는 그날의 날씨와 계절이 아니면 경험할 수 없다. 풍요가 오히려 희소성을 갈망하게 만든 것이다.

인생에도 제철은 있다.

제철의 가치는 음식이나 소비를 넘어 삶을 바라보는 방식에도 중요한 통찰을 준다. 모든 것에는 저마다 때가 있다. 배움의 제철이 있고, 사랑의 제철이 있으며, 도전의 제철과 쉼의 제철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자신의 계절보다 타인의 계절을 먼저 바라본다. 누군가는 이미 꽃을 피웠고, 누군가는 열매를 맺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럴수록 아직 싹을 틔우고 있는 자신의 시간을 늦었다고 오해하기 쉽다.

프랑스 작가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는 《어린 왕자》에서 기다림이 대상을 특별하게 만든다고 이야기한다. 여우는 어린 왕자에게 함께 보낸 시간이 장미를 특별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모든 성장에는 서두를 수 없는 시간이 필요하다. 열매가 익는 데 계절이 필요하듯, 사람도 저마다의 계절을 지나며 비로소 제 빛을 낸다.

고대 그리스어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기에 가장 적절한 순간을 뜻하는 ‘카이로스’라는 단어가 있다. 우리의 인생에도 분명 제철이 있다. 저마다의 ‘카이로스’는 남의 달력이 아니라 자신의 시간 속에서 찾아야 한다. 자신의 삶을 긍정하는 사람만이 자신에게 주어진 계절을 온전히 살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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