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에도 설계가 필요하다 건축가 유현준이 경험을 짓는 법

2026.09.203분

소유의 시대가 저물고 경험의 시대가 열렸다. 우리는 공간에 사는 것이 아니라 경험 속에 산다. 이제 건축은 벽과 지붕을 세우는 일이 아니라 사람의 감정과 행동, 관계를 설계하는 일이다. 변하는 세상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을 탐구해온 건축가 유현준에게 공간이 만드는 경험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건축을 “공간을 통해 관계를 디자인”하는 것이라고 정의하는 유현준은 모든 설계마다 '관계의 회복’과 ‘화목하게 하는 건축’에 중점을 둔다. 공간이 단순히 기능적인 곳에 머무르지 않고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의 관계를 조율한다고 믿는 그를 사람들은 ‘공간 인문학자’라 평한다.

건축가 유현준 인터뷰 사진
(출처 : 신한 Premier 매거진 여름호)

Q. 최근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10주년 기념판이 출간됐어요. 그동안 팬데믹과 AI, 플랫폼 경제가 도시의 풍경을 바꿨는데요. 지금 다시 책을 쓴다면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질문에 어떤 답을 내리시겠어요?

사실은, 제가 생각하는 답을 정해 놓고 만든 제목이 아니라 열린 질문이었어요. 그걸 해석하는 사람들이 다 자기만의 답을 찾기를 원했거든요. 정답을 만드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어쨌든 공간은 시대에 따라서 매번 바뀌고, 사람들의 생각도 달라지잖아요. 그에 따라서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거죠.

Q. 1990년대에 ‘경험경제’ 개념이 등장한 후로 이제 소비의 중심이 ‘소유’에서 ‘경험’으로 완전히 이동했어요. 건축가이자 공간 인문학자로서 이 흐름을 어떻게 보시나요?

과거에는 고정돼 있는 정보를 제공하는 것에서 끝났다면 지금은 사용자들이 대상과의 상호관계에서 또 다른 새로운 경험을 만들어냅니다. 그 새로운 경험은 휴대폰 카메라와 SNS라는 공간이 생겨서 그렇다고 봐요. 과거처럼 내가 소유한 물건으로만 나를 표현하는 게 아니라, 내가 경험한 것들을 사진으로 남기고 그걸 내 SNS에 박제해 놓고 컬렉션 하면 그게 내 공간이 되는 거죠. 나를 표현하는 또 다른 방식이 되는 거예요. 젊은 친구들이 윗세대보다 그런 ‘공간’에 관심이 많고, 그러한 체험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어요. 스마트폰 카메라와 SNS가 없었다면 사실 그 방향으로 많이 발전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Q. 작년에 출간하신 《공간 인간》에서는 인류가 건축 공간을 이용하면서 진화했다고 하셨어요. 새로운 공간이 새로운 문명을 탄생시킨다는 맥락인데, 그 ‘새로운 공간’은 어떤 모습일까요?

새로운 공간이란 사람들의 관계를 재조직할 수 있는 공간인 것 같아요. 그 책에 대표적으로 나온 게 그리스 반원형 극장인데, 관객과 무대에 있는 사람들이 권력을 나눠서 가지게 되는 현상이 일어나거든요. 아파트라는 공간도 사실은 대한민국에서 부를 재분배하는 데 크게 도움을 줬어요. 밀도가 높은 도시를 만들었기 때문에 상업이 활발해졌고, 상업을 통해 돈을 벌 수 있게 되니까 자수성가가 가능해진 거죠. 농경시대는 땅을 물려받은 사람들에게만 부가 대물림되는 정체된 시대였거든요. 근대에 와서 밀도 높은 도시를 만드니까 다양한 직업이 생겨나고,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돈을 벌 수 있는, 소프트웨어로 자수성가할 수 있는 사회가 비로소 만들어졌다고 생각해요. 시대마다 새로운 기술에 의해 새로운 건축이 나오는데, 그 이전에는 없었던 공간이 사람들 간의 관계를 바꾸고, 경제구조를 바꾸고, 결국 사회구조도 바꾼다고 생각합니다.

Q.‘경험경제 2.0’ 시대에서 사람들이 새로운 공간에서 찾는 건 ‘경험’일까요, 그걸 뛰어넘는 ‘정체성’일까요?

둘 다라고 생각해요. 저는 인간이 항상 순수한 동기만으로 움직인다고 보지는 않거든요. 물론 경험 자체를 원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담아두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사람은 소수라고 생각해요. 그보다 자기를 표현하고 과시하려는 욕구가 많다고 보는데, 그러한 본능이 자극됐을 때 성공적인 비즈니스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아요. 지금처럼 자기만의 경험을 하려는 현상이 대중적으로 확산된 이유는, 그 대상 자체를 높게 평가한다기보다 그 경험을 통해서 나를 표현하고, 과시할 수 있는 방법이 되니까 많은 사람이 참여하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Q. 교수님께서도 특별한 경험을 위해 시간을 투자하신 경험이 있나요? ‘경험에 투자’했던 경험, 그 경험이 가져온 변화를 독자들과 공유해주세요.

제가 가는 모든 해외여행이 다 그렇다고 할 수 있어요. 낯선 경험을 할 수 있는 공간에 저를 던져 놓고, 거기서 만나게 되는 많은 이벤트가 사실은 엄청난 경험들인 거죠. 지금까지 가장 특별한 경험은 학창 시절 로마에서 한 달 정도 머물며 건축과 수업을 들었던 일입니다. 그때 말도 잘 안 통하는 한 낯선 도시에서 한 달을 살았는데, 음식을 사 먹는 게 아니라 직접 장을 보고 요리를 해서 먹었어요. 그냥 관광객으로 가서 3박 4일 지낸 게 아니라 시장에서 재료를 사서 밥을 해 먹고, 빨래도 하고, 그러다 보니 현지인들과 비슷한 생활을 하게 되었죠. 그런 경험들이 제게 특별한 경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건축가 유현준의 사무실 사진
(출처 : 신한 Premier 매거진 여름호)

Q. 한국의 아파트 문화가 하늘과 골목을 빼앗았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렇다면 우리가 되살려야 할 것은 어떤 유형의 공간일까요?

아파트는 장점이 많지만, 단점은 건물 밖에 나올 일이 별로 없다는 거예요. 주택은 골목길을 거치면서 자연도 보고 다른 사람들도 만나는 등 인터랙션이 많은 공간이잖아요. 아파트는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이동하고 주차장도 갖춰져 있는 등 생활방식이 편리해진 대신, 우리의 일상 경험이 단조로워지면서 다른 사람과 마주칠 기회도 줄어들게 되었어요. 그걸 개선하려면 사람들이 더 많이 걸을 수 있는 공간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대로변에서 1인칭 시점에서 바라보며 경험하는 것이 얼마나 다채로울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곳이 바로 공덕동 경의선 숲길 공원입니다. 물론 고층 아파트도 있지만 공원에 접한 1층 거리에는 다양한 가게들이 있고, 사람들이 거기서 차도 마시고, 강아지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도 구경하죠. 이런 다양하고 많은 일이 1층에서 이루어지는 만큼, 그러한 경험이 가능한 구조를 함께 만들어줘야 된다고 생각해요.

Q. 다행히 한국인의 공간 감수성도 많이 달라졌어요.‘인증샷’을 찍기 위해 공간을 찾고, 공간 자체가 콘텐츠가 되기도 하는데, 이런 흐름이 공간을 설계하는 데 어떤 영향을 주는지 궁금합니다.

일단, 아직은 건축에서 의사결정자들이 젊은 친구들이 아니라는…(웃음) 건축주 대부분이 올드 제너레이션이에요. 그래도 젊은 친구들의 소비를 촉진하고 끌어내는 데 관심을 갖기는 하는데 아직 설득에는 조금 어려움이 있어요. 대중 강연을 하고, 책을 쓰고, 유튜브 활동을 하는 가장 큰 이유가 그분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풀어서 얘기하는 데 있어요. 그냥 설계 도면만 보면서 얘기하는 것보다 책이나 유튜브 영상을 미리 접하신 다음에 얘기를 나누면 허들이 낮아지잖아요. 건축은 컨센서스가 마련돼야 해요. 어떤 사람들은 구조만 보고, 또 어떤 사람들은 외관의 형태만 볼 수도 있는데, 건축주의 여러 관점과 가치관이 제가 공간을 ‘사람들의 관계를 컨트롤하는 장치’로 보는 시각과 맞닿아 있으면 왜 이런 설계가 나오는지 이해하실 수 있어요. 수많은 의사결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공간이 나오는 건데, 그분들과 공통분모를 만들면 의사결정하기가 더 수월해지는 거죠.

Q.자하 하디드나 헤더윅 같은 세계적인 건축사무소를 제치고 JYP 신사옥 프로젝트에 교수님 설계안이 당선되었어요. 이번 결과를, 교수님의 공간 철학이 실제 시장에서 선택받는 ‘실천적 모델’이 되었다는 의미로 봐도 될까요?

그렇죠, 저도 그걸 무척 고무적으로 생각해요. 사실 그 설계안이 당선된 건 박진영 씨와 코드가 맞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분이 생각하는 가치관과 저의 가치관이 비슷하게 맞아떨어졌겠죠. 건물 전체에 스며드는 채광과 통풍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점, 커뮤니티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자연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 등 이런 모든 것이 잘 맞았던 것 같아요.

Q. 당선안 주제가 중정을 품은 ‘밥상’이었어요. 아티스트와 임직원을 비롯해 팬들까지, 모두에게 자연을 경험하고 ‘K-문화’ 콘텐츠 경험을 섭취하게 한다는 의미인가요?

쉽게 말해서 접점을 늘린다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예를 들어, 다른 기획사들은 팬들이 건물 외관을 보는 걸로 끝나는 곳이 많잖아요. 그런데 저희는 중정을 만들고, 팬들을 그 안까지 들어오게 해요. 그러면 자기가 좋아하는 아티스트가 있는 공간에 둘러싸이는 느낌이죠. 연애할 때도 상대가 나를 안아줄 때 느낌이 다르듯이 공간으로 사람을 품어주고 관계를 맺으면 팬 입장에서는 훨씬 몰입감 있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겁니다. 아마 그 안에서 쇼케이스나 연습생들의 버스킹 같은 다양한 이벤트가 정기적으로 진행될 거예요. 크고 작은 공연장도 있고, 로비 공간을 공연장으로 컨버트할 수도 있고요. 기획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곳을 찾는 사람들이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을 거예요.

Q. 메타버스나 생성형 AI 같은 디지털 경험이 급성장했어요. 이런 시대에 물리적인 건축 공간이 지닌 궁극적 가치는 무엇일까요.

이런 시대일수록 건축 공간의 가치가 더 중요해지는 것 같아요. AI로 경험하는 콘텐츠가 엄청나게 늘어났지만 사실 우리는 눈으로만 세상을 경험하는 건 아니잖아요. 몸으로 경험하는 건데 우리가 몸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자꾸 잊는 것 같아요. 건물에 들어가면 일단 스케일감이 느껴지고, 발자국의 에코도 다르게 느껴지고, 계단을 오를 때는 중력을 거스르면서 힘들어하고, 편안한 의자에 앉으면 내 체중을 잠깐 잊을 수도 있고, 여러 가지 느낌이 있잖아요. 또 다른 사람을 우연히 만나 새로운 관계가 만들어지기도 하죠. 이건 AI로 생성하는 콘텐츠가 줄 수 없는 뭔가 다른 차원의 경험이거든요. AI로 생성하는 콘텐츠 양은 무제한으로 늘어나고 있지만 오프라인 공간은 한정적이죠. 지구의 공간은 정해져 있고, 그렇기 때문에 그 가치가 상대적으로 더 중요해지는 것 같아요. ‘경험경제’ 개념을 주창한 조지프 파인과 길모어는 이제 기업이 경험의 공급자가 아니라 변화를 이끄는 안내자가 돼야 한다고 말해요.

Q. ‘경험경제’를 넘어 ‘전환 경제’를 얘기하는데요, 그에 맞춰 교수님이 생각하는 도시와 건축의 방향도 바뀔까요?

건축이 흥미로운 이유는 언제나 조건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시대와 기술, 예산은 끊임없이 변하지만 건축가의 역할은 그 안에서 가장 좋은 답을 찾는 일이죠. 그래서 저는 세상이 빠르게 변할수록 오히려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을 바라보려 합니다. 공간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잇고, 마음 깊은 곳을 울리는 경험을 만들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제가 꿈꾸는 건 시대의 유행을 좇는 건축이 아니라 500년, 1,000년이 지나도 사람의 영혼을 건드리는, 타임리스한 공간입니다. 그런 건축은 세상을 좇기보다 자신의 내면을 끝까지 들여다보는 데서 시작됩니다. 가장 깊은 내면에 닿을 때 비로소 모든 인간이 공유하는 본능과 감정을 만날 수 있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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