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의학자의 삶과 시간에 관한 인터뷰
“결국 시간이 많고 적다는 것은 시간의 양이 아니라, 타인에게 종속되지 않고 내가 주인으로서 쓸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되느냐의 문제입니다. 주인으로서의 시간이 많을수록 양질의 삶이라고 봅니다.”
❓:최근 방송 출연을 비롯해 다양한 활동으로 바쁜 하루를 보내고 계실 것 같은데요. 요즘 새롭게 관심을 두고 공부하고 계신 분야가 있으신가요?
✍🏻:명리학을 조금 공부해봤어요. 사람마다 나타나는 변화의 공통점이나 확률적 패턴이 궁금했거든요. 그런데 외울 것도 많고, AI가 저보다 훨씬 빠르게 학습하더라고요. 그래서 직접 공부하기보다 AI에 조금 더 세련된 질문을 하는 쪽으로 바꿨습니다.
❓:법의학자로서 가장 중요하게 지키는 원칙이 있다면요?
✍🏻:객관성과 중립성입니다. 의사를 꿈꾸는 학생들에게 ‘정의감에만 불타지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의사는 선한 사람만 치료할 수 없고, 법의학자 역시 상대가 어떤 사람이든 한 인간으로 바라봐야 해요. 선악을 재단하는 것은 우리의 직업적 소명이 아닙니다. 초창기에는 감정서에 사인뿐 아니라 누가 무엇을 잘못했는지까지 쓰려 했습니다. 하지만 책임을 판단하는 것은 수사기관과 사법부의 영역이죠. 경험이 쌓이면서 내가 갈 수 있는 곳과 넘어서는 안 될 선을 알게 됐습니다. 다만 제 역할과 다음 역할 사이에 작은 틈이 있다면 그것까지 메워주려 합니다.
❓:사람들은 늘 시간이 부족하다고 하면서도 정작 중요한 일은 나중으로 미룹니다. 다양한 삶의 경험을 축적하신 교수님이 보시기에 사람들이 가장 자주 하는 착각은 무엇인가요?
✍🏻:로마 철학자 세네카는 시간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시간을 제대로 쓰지 못할 뿐이라고 했습니다. 타인의 일정과 기준에 맞추다 보면 정작 나를 위한 시간은 줄어들죠. 제가 좋아하는 영화 <인 타임>에서는 시간이 곧 화폐이자 생명으로 그려집니다. 부자는 수만 년을 소유하지만, 가난한 사람은 하루를 벌어야 생명을 이어갈 수 있어요. 결국 중요한 것은 시간의 양이 아니라, 내가 주인으로서 쓸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되느냐입니다.
❓: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길보다 꼭 필요한 일을 하는 삶을 선택하셨는데요.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그때도 같은 선택을 하실 건가요?
✍🏻:법의학은 의과대학 6년과 인턴, 병리학 전문의 수련을 거쳐야 비로소 시작할 수 있는 긴 길입니다. 보수가 상대적으로 낮은 공직을 택해야 하기에 잠깐의 호기심만으로는 버티기 어렵죠. ‘불광불급(不狂不及)’, 깊이 원하고 몰입해야 걸을 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꼭 필요하지만 하는 사람이 적기에 한 사람의 역할이 크다는 점도 매력적이고요. 더 많은 물질적 자산보다, 내 시간을 주체적으로 쓰며 필요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제게는 더 소중한 자산이었습니다.
❓: 평소 하루를 시작하는 방법도 궁금합니다. 시간을 관리하는 교수님만의 습관이 있나요?
✍🏻:매일 아침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읽습니다. 황제가 전쟁터에서 자신에게 남긴 메모를 모은 책이니, ‘나에게 쓰는 일기’라고 생각합니다. 타인의 일기를 읽는 것은 그의 인생과 내 인생을 함께 사는 일이라 삶을 두 배로 경험하게 해줍니다. 책을 읽은 뒤에는 그날의 일정을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해요. 누구를 만나고 어떤 이야기를 할지 그려본 다음 움직이죠. 그러면 내 발자국과 내 속도로 하루를 걷는다는 느낌이 듭니다.
❓: 바쁜 삶이 마치 능력처럼 여겨지는 시대입니다. ‘바쁘게 사는 삶’과 ‘잘 사는 삶’은 어떻게 다를까요?
✍🏻:바쁘다는 것은 대개 타인의 시간에 맞추고 있다는 뜻입니다. 정해진 시각에 도착하고 제출해야 하니 바쁜 거죠. 나를 위한 시간이라면 그렇게 바쁘지 않습니다. 저는 인생을 잠수복을 입고 물속에 들어가는 일에 비유하곤 합니다. 육체라는 잠수복을 잠시 빌려 물속을 경험하고, 때가 되면 다시 벗는 것이죠. 인생은 완벽하게 살아 타인에게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경험하기 위해 주어진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잘 산다는 것은 남의 속도에 맞추는 대신 내게 주어진 경험을 내 속도로 충실히 통과하는 일에 가깝다고 봐요.
❓: 법의학자로 오래 일하다 보면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놀라는 순간이 있나요?
✍🏻:이 일을 오래 했으니 웬만한 일에는 초연해질 것 같지만, 오히려 익숙한 일상이 한순간에 흔들릴 때마다 놀랍니다. 우리가 안전하다고 믿었던 백화점과 지하철, 여객선, 공항, 축제 같은 평범한 공간에서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날 수 있으니까요. 어쩌면 인간은 ‘오늘도 별일 없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의지하는 것들은 조금씩 낡고, 마모되고, 변해갑니다. 그럴 때마다 오히려 삶의 본질을 생각하게 됩니다. 지금 내게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돌아보게 되죠.
“‘둠스피로 스페로(Dumspiro, spero)’, 숨쉬는 동안 희망이 있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걱정하느라 정작 오늘을 놓치지 않았으면
해요.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시간을 가졌느냐 보다 주어진 시간을 무엇으로
채우느냐입니다.”
❓: 지나고 보면 인생에서 가장 귀한 시간은 처음부터 그렇게 보이지 않았던 시간일지도 모릅니다. 교수님께도 당시에는 그저 견뎌야 했지만 훗날 돌아보니 특별한 의미로 남은 시간이 있나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일하며 광주나 대전으로 오가던 새벽 출퇴근 시간이었어요. 당시에는 왕복 두 시간이 힘들게도 느껴졌지만, 차창 밖으로 계절의 변화를 보고 클래식 음악과 영어 강의를 들었죠. 감정서를 쓰다 막혔던 문장이나 단어가 운전 중에 문득 떠오르기도 하더군요. 유튜브도 없고 카세트테이프와 라디오뿐이던 때였지만, 그 짧은 시간에 생각이 깊어졌습니다. 억지로 주어진 듯한 시간도 어떻게 받아들이고 쓰느냐에 따라 귀한 시간이 될 수 있는 거예요.
❓:흔히 ‘시간을 아끼라’고 말하지만, 아끼지 말아야 할 시간도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교수님께서는 그런 시간으로 무엇을 꼽으시겠어요?
✍🏻: 시간을 아끼는 기술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해야 할 일을 미루지 않는 태도입니다. 사고 직전의 블랙박스 영상을 보며 ‘이 사람에게 단 20초가 다시 주어진다면 누구에게 무슨 말을 할까’ 생각한 적이 있어요. 아마 가장 가까워 소홀히 대했던 사람에게 “미안해, 사랑해, 고마워, 보고 싶어”라고 말할 겁니다. 과거는 바꿀 수 없고 미래는 알 수 없으니, 우리가 온전히 가질 수 있는 시간은 지금뿐입니다. 그러니 시간을 아끼는 것보다, 더는 미루어서는 안 될 마음이 무엇인지 돌아보는 일이 먼저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