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넬리 가문, 이탈리아 산업을 이끈 120년의 헤리티지

2026.10.143분

한 세기가 넘도록 시대의 중심에 서 온 가문, 아넬리(Agnelli). 자동차에서 금융, 패션과 문화에 이르기까지 세상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길을 택했지만, 한 가지는 변하지 않았다. 시대를 읽고, 다음 세대로 기회를 이어가는 힘 말이다.


토리노에서 시작된 산업 왕조

페라리와 유벤투스, 피아트. 오늘날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세 이름 뒤에는 하나의 가문이 있다. 바로 아넬리(Agnelli)다. 이야기는 1899년 토리노에서 시작된다. 조반니 아넬리(Giovanni Agnelli)는 몇몇 사업가와 함께 피아트(FIAT)를 세웠다. 자동차가 아직 소수의 부유층을 위한 사치품에 가까웠던 시대였다. 피아트는 곧 이탈리아 산업화를 이끄는 기업으로 성장했고, 아넬리라는 이름도 산업계의 중심으로 올라섰다.

하지만 조반니가 내다본 것은 자동차의 미래만이 아니었다. 1927년 그는 가문의 산업 자산을 관리하기 위한 지주회사 IFI(Istituto Finanziario Industriale)를 설립했다. 이후 IFI와 투자회사 IFIL은 2009년 합병해 오늘날의 투자회사 엑소르(Exor)로 재편됐다. 아넬리라는 이름이 자동차 공장 밖으로 번진 것도 이 무렵부터다. 1923년 조반니의 아들 에도아르도 아넬리(Edoardo Agnelli)가 유벤투스 회장에 취임하면서 축구와의 긴 인연이 시작됐다. 산업과 스포츠라는 전혀 다른 세계에 아넬리라는 이름이 동시에 자리 잡은 것이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물려받았다. 나는 여기에 책임이라는 의무를 더했을 뿐이다.”

잔니 아넬리

그러나 모든 가문에는 승계의 순간이 찾아온다. 1990년대 후반, 유력 후계자 조반니 알베르토 아넬리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승계 구도가 흔들리자 잔니 아넬리는 외손자 존 엘칸(John Elkann)을 새로운 후계자로 낙점했다. 1997년 피아트 이사로 선임된 엘칸은 차세대 리더로 준비됐고, 2003년 잔니의 별세 이후 가문의 중심에 섰다.

그가 물려받은 것은 ‘피아트’라는 이름 하나가 아니었다. 시대가 바뀌면 사업도 바꿔야 한다는 아넬리의 방식이었다. 피아트는 크라이슬러와 통합해 2014년 FCA로 재편됐고, 2021년 프랑스 PSA 그룹과 합병해 스텔란티스로 다시 태어났다. 필요할 때마다 판을 다시 짜고 자산과 사업의 무대를 옮겨온 것이다.

아넬리 가문AI 이미지

미래를 설계하는 헤리티지

오늘날 아넬리 가문의 중심에는 자동차 제조사가 아니라 투자회사 엑소르가, 엑소르 위에는 조반니 아넬리의 후손들이 지분을 보유한 공동 지배회사 조반니 아넬리 B.V.(Giovanni Agnelli B.V.)가 자리한다. 이 회사는 2025년 말 기준 엑소르의 경제적 권리 약 54.9%, 의결권 약 84.0%를 보유하고 있다. 가문의 지분을 하나의 회사에 모아 세대가 바뀌어도 지배력이 쉽게 흩어지지 않도록 설계한 구조다. 페라리는 이러한 전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969년 피아트가 페라리 지분 50%를 인수하면서 시작된 관계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페라리는 2016년 FCA에서 분리돼 독립 상장사로 출범했지만, 엑소르는 여전히 최대주주로 남아 있다. 브랜드를 독립시켜 희소성과 기업가치를 높이는 동시에, 가문의 영향력은 유지한 것이다.

토리노의 링고토(Lingotto)도 아넬리 가문의 헤리티지를 보여준다. 과거 피아트 자동차를 생산하던 공장은 오늘날 호텔과 상업 시설, 문화 공간을 품은 복합 공간으로 거듭났다. 자동차를 시험하던 옥상 트랙은 정원과 예술 공간으로 재탄생했고, 그 곁에는 잔니와 마렐라 아넬리의 컬렉션을 소장한 미술관이 자리한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물려받았다. 나는 여기에 책임이라는 의무를 더했을 뿐이다.” 잔니 아넬리는 이 말을 남겼다. 그들에게 상속된 것은 단순한 부가 아니라 기업과 브랜드, 이를 다음 세대로 이어가야 한다는 책임이었다. 120년 동안 피아트는 스텔란티스로, 산업 자본은 엑소르로, 가문의 리더십은 잔니에서 존 엘칸으로 이어졌다. 그럼에도 아넬리라는 이름은 여전히 이탈리아 산업의 중심에 있다. 무엇을 소유할 것인가보다 무엇을 끝까지 지배할 것인가를 매 세대 선택해온 것. 그것이 아넬리 가문이 이어온 진짜 헤리티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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